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,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.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루프레히트 폰 바이에른 (문단 편집) === 전간기 === 이후 그는 1921년, [[룩셈부르크]]의 안토니아 공주[* [[기욤 4세]]의 넷째 딸이다. [[마리아델라이드]]와 [[샤를로트(룩셈부르크)|샤를로트]]의 동생, 전처 마리 가브리엘레의 이종사촌이기도 하다.]와 전쟁을 비롯한 여러 가지 문제로 인해 미뤄졌던 결혼식을 올렸고[* 루프레히트는 두 번째 결혼이었으며 안토니아 공주와 루프레히트의 나이차는 무려 30살이었다.] 총 6명의 아이(1남 5녀)를 낳았다. || [[파일:4d15940a376411064c830332d4791bce.jpg|width=70%]] || || 1921년 안토니아 공주와의 결혼식 || 전간기 바이에른에서는 루프레히트를 왕으로 세워 [[바이에른 왕국]]을 유지하자는 의견이 있었다. 하지만 이는 실패하였고, 도리어 [[쿠르트 아이스너]]가 이끄는 공산주의 혁명을 피해 티롤로 대피하였으나 다시 바이에른으로 돌아왔다. 루프레히트는 [[제1차 세계 대전|이전의 전쟁]]의 책임을 독일의 황제 [[빌헬름 2세]]에게 넘겼고, 독일이 세계의 평화에 기여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. 루프레히트는 아버지가 사망한 뒤 [[비텔스바흐 가문]]의 수장이 되었다. 그는 군주제를 지지하였기에 [[바이마르 공화국]]을 못마땅하게 보았지만 나치를 지지하지는 않았다. 오히려 그는 반나치주의자로 바이에른 주지사였던 구스타프 리터 폰 카르가 [[나치당|나치]]에 기울어지는 것을 막았다.[* 이로 인해 카르는 [[장검의 밤]]에서 살해당한다.] 이후에도 그는 계속 군주제를 지지하였지만, 독일에는 두 번 다시 군주국이 설립되지 않는다.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-BY-NC-SA 2.0 KR으로 배포하고,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.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.캡챠저장미리보기